Research
31/01/2016

인도네시아 리포트 제 1부 서양형 ‘데모크라시’와 촌락형 ‘무랴와라’ 사이의 모순

글: 이와키 쿄코 번역: 마정연

어려운 시찰 과제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와 현대 예술 (특히 신체를 활용한 예술)의 관련성에 대한 조사>. 조금이라도 인도네시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한 줄을 읽고 이미 이 안에 다양한 개념적 마찰이 포함되어 있음을 눈치챘으리라. 우선 인도네시아라는 세계 제4위의 인구를 가진 다민족 도서 국가의 정치적 상황을 일괄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다는 사실. 두 번째로, 컨템포러리 아트라는 서양의 개념이 과거 식민지 지배를 경험했던 나라에 있어 무엇을 포함하고 무엇을 제외하는가라는 문제. 그리고 세 번째, 역시 서양에서 수입해온 개념이자 특히 수하르토(Suharto:1921-2008)의 군사독재 이후 남용되고 악용되어 온 정치적 논리인 민주주의에 대해 일반 시민들과 논의할 때 어떤 지역적 관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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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의 다양성부터 설명해보기로 하자. 흔히 말하듯, 이 나라는 리스본부터 이스탄불의 직선거리에 필적하는 동서 5000킬로미터에 분포하는 크고 작은 17,508개의 섬들로 구성되어있다. 그 가운데 약 6000개가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이다. 2억 3천만 명이나 되는 국민은 약 300개의 다른 민족집단으로 구성되며, 각 민족의 사용 언어도 200 내지 400가지나 존재한다. 종교도 복잡하다. 국민의 약 9할이 이슬람을 믿는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이지만, 인류학자 클립포드 기어츠가 지적하듯, 무슬림이라고 하더라도 애니미즘, 힌두, 불교적 요소를 느슨하게 융합하는 ‘아반간(abangan)’부터 엄격한 종교 체계를 유지한 아체주에 다수 거주하는 ‘산뜨리(santri)’까지 교의의 농도도 각기 다르다. 이처럼 민족적, 종교적, 언어적으로 다양한 국가를 하나로 아우르기 위해, 오가와 타다시가 『인도네시아 – 다민족 국가의 모색』 (1993) 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50년의 독립 이후 ‘다양성 속의 통일’이라는 슬로건 아래 다른 목소리를 하나의 나라로서 한데 모으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에 매료되어 이 땅에서 눈을 감은 베네딕트 앤더슨 의 명저 『상상의 공동체』(1983)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근본적으로 다른 민족을 하나의 국민으로 취급하는 담론은 정치적인 픽션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자하사 인도네시아어로 ‘정치’는 ‘폴리틱(politic)’이라는 외래어로 번역되어 국정을 개선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내정적 억압, 역사의 날조, 권력의 행사 등과 연관된 좋지 않은 명사, 형용사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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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활자 상의 조사 단계에서 이미 인도네시아의 복잡함, 다양함, 광대함에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건국의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책을 통해서는 맛볼 수 없는, 기온, 습도, 향, 소음이 뒤섞여 순식간에 밀려온다. 공항 도착 후, 사전에 예약한 택시에 승차하려 하자, ‘운전수가 늦게 오니 조금 기다려 주세요’라고 승차장 관리 담당의 온화해 보이는 청년이 말한다. ‘10분 정도 기다리면 될까요’라고 묻자, ‘더, 더’라고 말하면서 그는 깔깔거리며 웃는다. ‘조금’의 지연이란 10분이 아니라 30분이라는 자카르타식의 시간에 대한 상식을 접하는 순간이다. 주차장의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기다린 뒤, 겨우 택시에 탔더니, 이번에는 세계 최악이라는 악명 높은 교통체증에 걸리고 말았다. 더구나 ‘3 in 1(three in one)’이라고 불리는 교통 규제 때문에, 승차인원 3명 미만의 차량은 아침과 저녁의 출근 러시아워에는 시내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차 안에는 필자와 운전수뿐이다. 결국 시외 도로에 차를 세우고 7시 1분이 되길 기다린 후, 직선거리로 30분 정도의 거리를 3시간이나 걸려서 공복의 한계 상태로 호텔에 도착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자카르타 서민의 대부분은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해서 이 엄청난 교통체증을 피해 오피스에 도착한다고 한다.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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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교통 정체의 세례를 받은 덕분에, 다음날 오후에 방문한 자카르타 비엔날레의 행사장에서 아티스트 컬렉티브 Ruangrupa (Reza Afisina a.k.a. Asung)의 배너 형태의 작품을 보고 웃음이 나올 만큼 납득할 수 있었다. 풍부한 색채감을 가진 그 배너에는 자카르타 수도 및 특별주에 대한 간이 일러스트 지도와 함께, ‘everything is equal in the eyes of traffic jam (교통체증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이라는 메시지가 적혀있다. 아피시나의 작품은, 자카르타의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교육의 자유와 같은 대문자의 정치적 과제 이전에 생활 수준의 개선을 원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사람들과 민주주의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자마자, 제일 먼저 귀에 들어온 말은 ‘무샤와라 (musyawarah: 합의를 위한 토론, 협의)’라는 키워드였다. 싱가포르 국제 대학에서 문화 연구를 전공하는 아니사 베타씨는 이 개념을 영어의 ‘디스커션 (이야기를 나눔)’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다수결로 의견을 결정하고, 헌법에 의해 그 다수파의 의견을 조정하는 2중구조로 이루어진, 입헌 민주주의와 다른 인도네시아만의 ‘민주주의적’ 문화 장치라고 설명해주었다.

“흔한 오해입니다만 인도네시아는 무슬림 국가가 아닙니다. 다민족, 다종교 국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샤와라를 통해 무파깟(mufakat: 전원일치)에 이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만일 다수결로 결정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소수민족의 목소리를 버리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아무리 무슬림이 다수파라고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물 론 이는 이상론이다. 대화를 통해 전원일치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분명히 정치적인 몽상이다. 사상범으로 두 번 체포당한 경력이 있는 퍼포먼스 아티스트, 아라흐마이아니(Arahmaiani)씨의 지적처럼, 실제로는 인도네시아의 ‘다수파인 자바계 무슬림 남성이 ‘민주주의’라는 정의의 이름 하에 권력을 휘둘러왔다.’ 어느 곳에도 존재하는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시스템은 이 나라에도 역시 기능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이 나라에서 일상생활을 하며 실감한 것은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사회에서 비롯된 온화한 공존의 지혜이다. 유목 사회에서는 결단력이 있는 리더를 따르는 것이 서바이벌의 조건이 된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나 일본과 같은 농경사회에서는, 강자와 약자가 서로 손을 잡는 상호부조의 원리가 살아남기 위한 법칙이 된다. 즉, 캄풍(kampong: 마을) 사람들의 생생한 감각으로는 모두가 이야기를 나눈 뒤에 의견을 모아가는 ‘무샤와라 / 무파깟’ 의 이론이 더 친숙한 것이다. 다만 당연한 일이지만, 이 방법론은 대문자의 폴리틱과는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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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서양형 폴리틱 이론’과 ‘토착형 캄풍 이론’의 차이로 인해 인도네시아의 사람들은 두 가지의 상이한 민주주의적 방법론 사이에서 아직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예를 들어, 그 가운데 하나가 인도네시아 국립극장 설립안이다. 소위 근대 이후의 연극은 네덜란드어로 ‘tonil’, 산스크리트어로 ‘sandiwara’, 영어로는 ‘theater’ 라 불려왔다. 더욱이 이들 단어로 표현되는 ‘근대 연극’은 케토프락(kethoprak: 자바의 가무극), 루드룩(ludruk: 수라바야의 대중연극), 르농(lenong: 부다위의 희극) 등의 토착 연극 형태와 크게 다르다. 후자가, 야외에서, 기술되지 않은, 양식화된 연기를 즉흥적으로 연기하는데 반해, 전자는 실내에서 기술된 텍스트를 실시간으로 정형적으로 연기한다. 즉, ‘연극’이라는 개념에 부수하는 식민지 문화에 대한 저항감과 복수의 서브내셔널(subnational)한 아이덴티티를 무샤와라를 통해 하나의 ‘내셔널’한 연극로 수립하는 과제의 어려움 때문에 국립극장창설안이 여태껏 파행해 온 것이다.

이처럼 인도네시아에서는 ‘무샤와라 / 무파깟’이 다양한 방면에서 좋고 나쁜 영향을 끼쳐왔지만, 어찌 되었든 현실적인 사회 변화를 위해 가장 유효한 방법론이 아니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 결과, 대다수의 인도네시아 국민은 그다지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회 상황에 휩쓸려 ‘정치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라고 아니사씨는 말한다.

“우리들 라꺗(rakyat: 서민, 일반 사람, 국민, 대중)은, 정치적 중추부에서 너무 멀리 있습니다. 대통령이 있고, 그 아래 주지사, 시장, 부빠띠(bupati: 영주, 군수), 루라(lurah: 촌장)과 짜맛(camat: 공무원장, 면장, 읍장)에 이어, 루꾼 와르가(rukun warga: 지역 주민의 자치 모임)과 루쿤 투탄가 (rukun tettanga: 이웃 모임)에서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촌장으로부터 초대장이 오지 않으면 선거에도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도네시아인은 golongan putih (직역하면 백지당, 선거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중심은 항상 라꺗에게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예를 들어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는 당초 의회제 민주주의를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1959년에 의회를 해산했다. 이는 첫 총선거에 118개에 이르는 중소정당이 난립하고, 이슬람, 내셔널리즘,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존재하는 가운데 민주주의가 성립하지 않을 거라고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그는 ‘의회제 민주주의’를 정지시키고, ‘교도민주주의  (guided democracy)’라 불리는 일부 권력자에 의한 과점적인 국가를 운영해 나아갔다. 이는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는 다민족국가에 있어서의 ‘안정된 국가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인 방법론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높은 사람의 지도 하에 깊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안심하고 생활하십시오’라고 회유하는 정치 장치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이들도 물론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