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미 파질에게 물어본 민주주의에 관련한 10가지 질문 (말레이시아)
- 이름과 직업을 가르쳐 주세요.
파미 파질 (Fahmi Fadzil). 작가, 퍼포머, 정치가입니다.
- 좀 더 자세하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언젠가부터 예술과 정치에 대해 동시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경이었던가요, 그 무렵 쿠알라룸푸르의 대학에서 예술을 공부하기 시작해 연출가인 마크 테 (Mark Teh)를 만나 그와 아트 컬렉티브를 결성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학교의 밖에서는 ‘레포르마시 (Reformacy: 개혁) 운동’이 발발했습니다. 당시의 부총리 겸 재무상인 안와르 이브라힘 (Anwar Ibrahim)이 정치 부패에 분개하여 같은 불만을 가진 약 10만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마하티르 (Mahathir Mohamad)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내를 행진했습니다. 이 운동을 목격한 저는 우선 제 안에 생겨난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을 토해내기 위해 몇 편이나 시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이듬해 실시된 총선거에 자원 봉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아직 선거권도 갖지 못한 나이였지만요.
그렇지만 그 후 저는 정치와도 예술과도 관계가 없는, 화학공학의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9.11을 목격하게 됩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로든 무지각하게 그 후의 미국의 방침을 결정하는 듯한 미국의 친구들의 언동을 보고… 정말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그 가운데에 제일 깊이 생각했던 문제는 ‘자신의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였습니다.
그런 일들로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 후 화학공학의 지식을 살려 마츠시타 공업 주식회사에 취직했음에도 2개월 정도밖에 견디지 못했습니다 (웃음). 그동안에도 계속해서 시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와양 쿨릿 (Wayang Kulit그림자 연극)을 공부하기 위해, 토착문화가 남아 있는 켈란탄 주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술의 사회 공헌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예술 활동에서 멀어진다면 ‘ 그건 어떤 때일까’라고 자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항상 모국의 사람들을 위해 창작 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제가 만들어 내는 시나 와양 쿨릿에서, 어떠한 정치적인 이유로 관객이 없어지게 된다면…두 가지의 선택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서 관객에게 다가서는 것. 다른 하나는 관객을 되찾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정치 참여를 시작하는 것.
저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제 예술 관계자 친구들의 대부분은 어떤 부자유스러움을 느껴 말레이시아 이외의 나라에 망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정치 체제를 크게 개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저는 자신의 작품의 관객인 친구들을 모국으로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해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납득할 정도로 이 나라의 정치가 변화하고 친구들이 돌아와 줄 때, 그때 저는 안심하고 예술가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 부모님과 정치에 대한 견해가 다릅니까?
부모님은 두 분 모두 국가공무원으로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이유로 정치적인 견해를 바꾸는 것은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퇴직한 이후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저와 다른 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었지만, 퇴직한 이후에는 여당과 지방자치단체의 방침에 대해 달리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부모님께서 저의 방침을 지지해주시고 계십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말레이시아인의 ‘정치 리터러시’ ‘민주주의 리터러시’는 낮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정치적 소양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권리와 책임이 미치는 범위에 대해 인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부와 여당의 차이는 무엇인가. 입법과 행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러한 주제에 대해 가까운 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지역의 교육 시스템이 보다 좋은 성인이 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공립의 국민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국민 교육은 프리스쿨이라고 불리는 4살부터의 취학 전 교육으로 시작되어, 초등학교 6년, 하급 중학교 3년, 상급 중학교 2년, 대학 예비 과정 2년, 대학 3년으로 이루어진다. 초중학교는 무료. 의무화 교육은 아니다). 그곳에서 다양한 태생의 아이들과 사귀게 되었기 때문에 저는 자신이 받은 교육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말레이시아에는 단일민족적인 학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립의 중화 학교나 이슬람 학교 등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교육기관에서는, 특정 민족, 종교, 인종 등에 대해서 밖에 가르치지 않습니다. 또한 부미프트라 정책 (말레이어로 토지의 아이, 토착민을 의미. 말레이계 주민에 대한 우대 정책)도 편견이 섞인 교육을 행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말레이시아라는 다민족국가에 살아가면서 타인의 삶에 대해 호응하지 못하는 성인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최근에 저는 아내 그리고 아이와 함께 도쿄에 여행을 갔습니다. 이슬람교도이면서도 시부야의 거리를 걸으며 위험을 느끼는 일은 없었습니다. 만일 미국에 여행을 갔다면 그렇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도 같은 종류의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민족국가이면서도 민족이 분단된 채로 생활하게 하는 것이 말레이시아의 정치적 방침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치 방침을 따라 교육에서도 다양성을 부정하는 사회가 만들어져 왔습니다. 점점 더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민족 간의 ‘벽’이 퍼포머티브한 정치에 의해 날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소속된 인민공정당 (Parki Keadilan Rakyat)은 이러한 민족 간의 분단을 융합하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 최근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공격당해 기분이 상한 적이 있습니까.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에게 화가 났지요 (웃음). 농담입니다. 저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성차별적/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거나 혹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잘못을 하거나 하면 순간적으로 분노합니다만. 그 이외에 보통 사람들의 발언에 화가 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 최근 발언이나 행동을 자주 규제, 혹은 자기검열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정치가이므로 협상술에 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공격을 받을 만한 언어 사용을 하지 않고도 자신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와양 쿨릿의 문화에서 배운 방법론입니다. 와양 쿨릿에서는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는 기술이 채용되어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도 그 방법론을 충분히 배워 타인에게 주는 불쾌함을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에 대답하자면, 저는 자기 검열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검열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론을 선택할 뿐입니다.
- 지역 미디어가 선전하고 있는 거짓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말레이시아의 방송국은 국영기업입니다. 따라서 미디어의 대부분은, 정부의 프로파간다 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는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되고 있습니다’라고 정부가 하는 말 그대로의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행 정부는 26억 링깃 (약 7534억원)의 부정뇌물을 수상의 개인 계좌로 수수했습니다. 신문은 ‘큰 문제가 아니다’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큰 문제가 아닐 리가 없지 않습니까!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기능하고 있는 다른 나라라면, 이미 아주 오래전에 이러한 정부는 추방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말레이시아 인도 미디어가 진실을 전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이 있으면 어떻게든 정보는 돌게 되어 있으니까요 (웃음).
- 베르시 (Bersi: 말레이어로 청정이라는 뜻. 2007년부터 일어나고 있는 대규모 민주화 데모)는 실제로 기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베르시는, 특히 저희들과 같은 젊은 세대들에게,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데모가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해 주었습니다. 과거의 ‘데모’의 이미지는 경관과의 대결, 최루가스, 방수탄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르시는 온건하고 평화적이고 좀 더 스마트하게시민의 불만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민주화 운동이 쿠알라룸푸르에 너무 집중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말레이시아는 13주와 3개의 연방 직할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바 주, 사라와크 주 등 말레이 반도 이외의 땅에 사는 사람들도 민주주의에 대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베르시 4.0의 약 10일 뒤, 말레이 무술연합회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 계통 말레이 민족이 중화가에서 정부 지지 데모를 했습니다. 우익들은 베르시의 테마 컬러인 노란색에 대응해서 전원이 붉은 양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통칭 ‘레드셔츠 집회’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이 여당 지지자들이 지역의 경관들에게 밀려 최루가스를 마시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당 관계자가 최루가스 공격을 받는 일은 역사상 최초의 일이랍니다! 확실히, 이 나라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 헌법/ 법률의 한 항목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떤 항목을 바꾸고 싶습니까.
알고 계시다시피, 1969년에는 ‘5.13 사건’이라고 불리는 민족 충돌 사건이 쿠알라룸푸르에서 발발했습니다. 이 폭동을 계기로 말레이시아에서는 자유방임주의 체제로부터 국가 주도의 개발 체제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즉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어 자치단체의 의회가 주정부의 임명 위원으로 구성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실질적인 ‘자치’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창출해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정치가의 얼굴이 더 많이 보일수록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친화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정부가 임명 위원을 쿠알라룸푸르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쿠알라룸푸르의 사람들이 의원을 직접 선출하는 시스템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한 항목을 개정한다면 저는 1969년에 정지된, 시 단위의 지방자치단체의 의회 선거를 부활시키고 싶습니다.
- 모국에서 ‘예술의 자유’가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국가에 저항하려 하는 것을 ‘부적절한 시기’라고 하지만 않는다면 무엇을 표현해도 괜찮습니다. 언제 발언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파이브 아츠 센터에서 1999년에 (Huzir Sulaiman작, Krishen Jit연출)라는 작품을 같은 해의 총선거 직후에 발표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2004년에 다시 상연하려 했을 때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이듬해에 예정된 총선거 때문에 시의회가 희곡의 제출을 요구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검열을 받은 희곡에 대해 상연 불가라는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들 말로는 ‘공적으로 발언해서는 안되는 언사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재상연 당시에는 검열된 부분을 극작가가 수정, 개정한 뒤 상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언제 그 작품을 상연하고, 누가 보러 오는지, 그리고 그 작품 내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전체적으로 고려하면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판단을 잘못하게 되면 무척 위험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