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29/01/2016

인도네시아 리포트 제 2부 현재진행형의 1965년과 ‘라꺗’의 권리

글: 이와키 쿄코 번역: 마정연

상황은 수카르노 퇴진으로 인해 더욱더 악화된다. 1965년 9월 30일 당시 육군 대신 겸 육군참모장이었던 수카르노는 군사 쿠데타를 계획 실행하여 이듬해 2월에 제2대 인도네시아 대통령 자리에 취임한다. 그는 스스로 정치적 입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수카르노의 지지 기반인 인도네시아 공산당원과 그 동조자라 알려진 중화계 민족, 인텔리 층, 노동조합의 멤버들을 숙청하기 시작한다. 이 숙청 작업을 서양 국가들이 뒤에서 돕고 있었다. 그 결과, 수카르노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약 100만 명에 이르는 소위 ‘공산당원’을 학살한다. 2016년 현재에도 희생자의 유족들은 정치 중추부에서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리더들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중화계 민족은 1998년 5월에 발발한 중국인 배척운동 당시 또 한 번의 학살과 강간을 겪었기 때문에 역사적 비극을 과거가 아닌 현재형의 폭력으로 경험하고 있다.

‘1965’라는 해는 인도네시아의 현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중심 용어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전국적인 대학살에 대해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아직도 너무나 많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 ‘21세기의 5대 학살’ 가운데 하나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은 죠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에 의한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2012)이다. 2014년에 처음으로 국군 출신이 아닌 조코 위도도(Joko Widodo)가 대통령직에 오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실이 은폐되고 개찬되어 왔다. Ruangrupa 소속의 비디오 아티스트, 마할디카 유다(Mahardika Yudha)씨와 앞에서 소개한 아라흐마이아니 씨 등 많은 아티스트들이 지적하듯, 1965년의 비극은 아직도 많은 교육 기관에서 왜곡된 형태로 논의되고 있다. 교사들은 ‘잔학한 공산당원을 응징하여 민주주의(데모크라시)를 확대해주신 수카르트 군사정권의 영웅들에게 감사합시다’라는 아름다운 픽션을 아이들에게 전하고 있다. ‘데모크라시’라는 외래어에 혐오감을 표현하는 아티스트들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일본인에게는 ‘민주주의란 좋은 것이다’라는 상당히 나이브한 기성 개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일본인인 필자도 처음에는 다른 뜻 없이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기능하고 있습니까?’라고 그 지역의 아티스트들에게 질문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실례가 되는 질문이다. 많은 인도네시아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면서 쓴웃음을 짓는 표정으로 ‘노’라는 비언어적인 대답을 동시에 한다. 왜냐하면 이 ‘예스’에는 모순된 두 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나라에는 정치적 제압에 의해 이루어낸 데모크라시가 있다. 그 때문에 인도네시아 정치 연구자인 혼나 준이 『민주화의 패러독스 –인도네시아에서 보는 아시아 정치의 심층』 (2013)에서 상세하게 논하고 있듯, 예를 들어 2010년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자카르타를 방문해 국립 인도네시아 대학에서 ‘인도네시아의 종교적인 관용과 민주개혁의 성공’이라고 이 나라의 위업을 칭송한 바 있다.

그렇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겉모습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개별적인 구성 요소인 국민주의, 표현의 자유, 선거권, 교육의 자유 등의 시스템이 ‘기능하고 있습니까?’라는 개별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필자가 만난 이들의 대부분이 ‘노’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해, 인도네시아의 많은 아티스트들은 데모크라시란 서양 국가들이 주입하고 정부에 의한 대량학살을 긍정하기 위해 교묘하게 도입된 정치적 담론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인도네시아의 소위 ‘데모크라시’란 일본인이 상상하는 민주주의와는 동떨어진 개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인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대문자의 정치 개념을 분해하여 생활 수준의 과제로 바꾸어나갈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전술한 교통 체증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국민을 우선적으로 생각한 정치가 실제로 행해지고 있다면 이 지경까지 인프라의 정비가 외면받고 있을 리가 없다. 혹은 몇 개월 전에는 국내 매장 면적 400 제곱미터 미만의 미니마켓 (편의점)에서 주류의 판매가 금지되었다. 필자가 만난 이슬람교도들은 원래 술을 마시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판매금지 사태 때문에 곤란을 겪는 이들은 적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다른 가치관을 포옹하는 나라가 국가 레벨에서 술의 판매를 ‘금지’해서 좋을 일은 없다. 이 사례를 보고 위에서 소개한 마할디카 유다씨는 ‘예전에는 국가로부터 수직 방향의 검열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웃들로부터 수평 방향의 검열이 이루어지고 있어 두렵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다’라고 최근 생활 레벨에서의 민주화의 저하에 대해 탄식했다.

Ita NadiaIta Nadia

이러한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폴리티컬한 겉모습’과 ‘라꺗의 속마음’이라는 이중구조는 무슬림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나라에서는 남녀동권 문제에 있어서도 부각된다. 족자카르타에서 취재한 여성인권활동 단체 Kalyanamitra(산스크리트어로 여성의 벗이라는 의미)의 창설자이자, 유엔 여성 기금의 시니어 어드바이저이기도 한 이타 나디아씨는, 필자가 여태껏 만나온 여성들 가운데 가장 강인한 신념, 사고, 언어, 행동과 인격을 가진 무슬림 여성이었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1945년에 공포된 인도네시아 공화국 헌법 제27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이, 모든 국민은 법과 행정에 있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라고 명백하게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코란 제4장 여인의 장, 제34절에는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다. (…) 바람직한 여성은 순종적이고 겸허하며, 남편의 부재중에 그의 비밀과 권리를 지킨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는 물론 남성의 우위성을 보증하는 가르침이 아니다. 남성도 여성도 각각 경건하게 신을 섬길 필요가 있다는 구절이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이 구절을 남용하여, 여성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사람들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고 이타씨는 말한다. 또한 남성의 기득 권익을 위협하는 여성에 대해 항상 위로부터의 폭력이 행해지고 있다. 그녀도 그러한 폭력의 희생자의 한 명이다.

“제 아버지는 일본의 점령군에 저항하여 싸운 좌익활동가, 어머니는 노동조합에 소속된 활동가였습니다. 다시 말해 제 안에는 태어날 때부터 활동가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자신의 마음을 따라, 여성 해방을 위해 싸워왔습니다. 하지만 군사정권하에서 무슬림 여성의 권리를 외치는 행위는 상상하시는 것처럼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문에 한 번 투옥된 적이 있고 그렇게 같은 권리를 주장하고 싶다면 바라는 대로 남성과 동등한 취급을 해 주겠다며 끔찍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저의 현재의 파트너도 공산당계 문화단체 ‘레끄라 (Lekra=Lembaga Kebudayaan Rakyat: 국민문화협회)’에 소속된 국민적인 시인으로 최근까지도 몇 해 동안 투옥당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저의 사명은 우선 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술의 힘을 빌려 억압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해방시키고 싶습니다. 예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녹이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에 맞서 싸울 강인함을 불어 일으킬 수 있습니다.”

Kunci 문화연구센터

이타씨의 말에는 깊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의지로 치유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럽게 마음속 깊이 전해오는 무게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신념이 딸인 디나 나디아씨에게 이어져 ‘아트에 의한, 정치가가 아닌 사람들, 라꺗을 위한 민주화’가 담담하게 족자카르타의 일각에서 계속되고 있다. 1999년에 설립된 NPO 단체 Kunci 문화연구센터 에서 일하고 있는 디나씨는 엘리트층이 아니라, 라꺗이 향수할 수 있는 예술을 널리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아직까지도 문맹이 적지 않은 이 나라에서는 책이나 강의보다는 ‘신체를 활용한 퍼포먼스’가 유효하다.

“퍼포먼스를 이해하기 위해 활자는 필요 없습니다. 또한 활자로 적혀있지 않기 때문에 검열의 걱정도 없습니다. 제 모토는 레끄라의 사람들이 외치는 뜨르바(Turunke bawah의 줄임말. 사람들의 곁에 내려오다라는 의미)입니다.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역의 라꺗과 함께 생각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토니 모리슨의 애독자라고 하는 디나씨는 아직 20대 전반의 젊은이이다. 그녀는 일류 교육을 받은 엘리트이며 스스로가 엘리트라는 강한 긍지를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 위에 서려는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곁에 내려와 아래에서 위로 전달되는(bottom-up) 좀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나간다. 몇 십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온 위에서 아래로 전달되는(up-down) 형식의 ‘데모크라시’와는 크게 다른 라꺗을 위한 민주주의가, 공포정치를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 세대에 의해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있다.